그리스도인으로 우리는 이스라엘과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할까요? 이스라엘과 어떤 식으로 연결되어야 할까요? 로마서 11장 17-24절에서 바울은 이 생명에 필수적이고 유기적인 연결을 하나님의 언약 가족인 올리브 나무에 접붙임 되는 것에 비유합니다. 이 가르침을 완전히 이해하려면 먼저 성경적 용어로 “이스라엘”에 세 가지 기본적인 의미가 있음을 이해해야 합니다.
유대 민족
“이스라엘(하나님과 함께 하는 왕자)”은 창세기 22장에서 야곱이 하나님의 사자와 그 유명한 겨루기를 한 후에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주신 이름으로 처음 등장합니다. 이 기본 단계에서 “이스라엘”은 단지 열두 지파의 위대한 족장에게 주신 이름이었고, 후에 그들의 자손에게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언약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는 영원히 당신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 나타내십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이러한 족장들의 육신의 후손을 나타내며, 나중에 이들은 유대 민족으로 알려지게 됩니다.
이스라엘 나라와 이스라엘 땅:
약 400년 후 이스라엘 지파들의 인구는 크게 증가했으며, 그들은 나라가 될 준비가 되었습니다. 시내산에서 백성들은 그들의 문화, 법률, 사회를 정의할 기본 요소들이 담긴 토라/율법을 받습니다. 약속의 땅에 들어간 후, 다윗과 그의 후손들 아래서 그 나라를 영원한 메시아의 왕국으로 세우는 또 다른 언약이 있습니다(삼하 7장). 이 나라/왕국은 예루살렘 곧 다윗의 성을 영원한 수도로 삼고 있습니다. 그렇게 “이스라엘”은 특정한 땅, 자본, 경제 등을 가진 하나의 나라가 되고, 또한 미래에 전 세계적 메시아 왕국의 중심지로 회복될 것을 약속 받습니다(사도행전 1:6).
이스라엘, 구원받은 남은 자들:
여기서 약간 까다로워집니다. 신약에서 특히 바울 신학에서 우리는 모든 세대에 더 넓은 이스라엘의 영적 부분집합 곧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충만한 약속이 성취되는 구원받은 남은 자들이 있음을 알게됩니다. 겉으로 보기에 이 유대인 그룹은 다른 유대인들과 똑같이 보이고 같은 언어를 사용합니다. 그러나 내면적으로 그들의 마음은 거듭났으며 “할례를 받았고”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습니다. 대다수의 유대 민족이 그 세대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로운 계시에 신실하게 반응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때에도 (대부분의 역사를 통틀어 그랬던 것처럼), 거룩한 남은 자들로 인해 온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은 여전히 참됩니다(롬 11:6). 엘리야 시대, 바울 시대, 우리 시대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롬 9:6, 11:1~7). 더욱이 이제 새 언약 아래서 믿는 이방인들도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베푸시는 구원의 은혜에 대한 믿음의 이 언약적 올리브 나무에 “접붙임” 될 수 있습니다(롬 9:24, 11:17). 따라서 이스라엘은 예수님을 믿는 남은 자들로서, 먼저는 유대인들에게 또한 비유대인들에게, 함께 “한 새 사람”입니다(엡 2:15).
요약하면 1과 2는 이스라엘을 물리적 실체로 지칭하는 반면 3은 이스라엘을 보다 신비하고 영적인 방식으로 말합니다. 세 가지 모두 성경에서 “이스라엘”이 의미하는 바를 성경적으로 타당하게 표현한 것이며, 우리는 여러 경우에 어떻게든 서로 연결되어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로마서(특히 11:11~26)와 에베소서(2:11~3:6)는 유대인과 이방인(이스라엘과 열방)에 대한 하나님 계획의 계시의 “충만함”이 올리브 나무에 “접붙임”되는 것이라는 그분의 우선순위를 우리가 올바로 분별하는 것에 달려있다고 가르칩니다. 바울 서신은 새 언약 아래서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의 충만함이 그리스도(메시아) 안에서 발견되며, 또한 그 충만함이 이스라엘(백성, 국가, 남은 자들)과 맺은 그분의 모든 언약에 따라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관계를 정렬하는 것으로 말미암는다고 가르칩니다.
(2부에서는 이러한 관계가 실제적으로 어떤 모습인지 살펴볼 것입니다.)